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사 상륙작전 (문단 편집) === 큰 피해의 원인 === 장사 상륙작전은 적 후방 교란이라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그 '''작전의 성공은 당장 전멸해도 이상할 게 없는 악조건에서 부대원들이 엄청난 혈전을 벌인 끝에 이룩한 것'''이며, 작전의 구성이나 지원면에서는 욕이 안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애초에 상술되어 있지만 학도병을 전선에 투입시켰고 '''이는 [[소년병]]의 투입으로 현대 기준에서 전쟁범죄'''다.[* 당시에는 이를 금지하는 국제법이 없었지만 현재는 [[UN 아동권리협약]] 등으로 금지되어있다.] 자세한 상황은 보면 볼수록 참담한데, * 부대원의 대부분은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으로, 훈련기간은 고작 2주에 불과했다. 즉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콩 튀듯이 흩어지거나 적군에게 항복하지 않은 것만 해도 용기가 엄청나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병력을 가지고 앞서 언급했듯이 수적으로 엄청나게 우세하며 전차와 포병의 지원을 받는 조선인민군 정예부대를 상대로 며칠간 혈전을 벌인 것이다. * 위에도 적었지만, 지급된 전투복과 무기는 모두 노획물자였다. 당시 한국군에도 무기를 비롯한 물자가 모자랐다는 사정이 있고 노획무기는 적지에서 탄약을 노획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원이 미흡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 부대의 유일한 지원장비는 [[전차상륙함|LST]] 1척[* 본문에 언급했듯 징발된 해운회사 선박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많은 LST들이 우방국 해군 및 민간 업자들에게 무상 혹은 저가로 공여되었기에 상선으로도 많이 쓰였다.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에 이런 풍경이 잘 묘사되는데,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LST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 만큼 흔했음을 알 수 있다. 문산호는 비록 군에 징발됐지만 선원들은 여전히 민간인이었는데, 본 작전에서 인민군에게 피격되면서 선장 등 선원 여럿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현재 침몰한 잔해의 인양 혹은 해상 공원화가 추진 중.]으로, 해당 함선은 상륙전용이라 원양항해에는 부적합하며, 고작 1척으로 상륙과 이후 철수를 모두 담당해야 하므로 유사시 탈이 나기 쉬우며, 이 점은 현실화되었다. 덕분에 상륙 초기부터 적의 집중사격으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고 그나마 없는 탄약과 장비를 망실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동행했던 구축함 엔디코트 함이 문산호를 선도하며 최대한 화력지원을 해 주어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였다. * 유사시 지원대책에 대한 사전 준비가 사실상 전무했다. 당장 상륙선이 좌초하면서 무전기가 바닷물을 먹어서 상태가 영 안좋더니 곧 고장나서 공군의 지원이나 함포사격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예비로 쓸만한 함선도 없어서 문산호가 좌초되자 대신 이들을 구출할 함선을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으며, 구출에 나선 조치원호를 근접 호위할 전력도 매우 부족했다. 덕분에 조치원호 근방에 박격포탄이 떨어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40여 명이 철수하지 못하고 포로가 된 것이다. * 참전 용사들의 말에 따르면 출발 전에 육군본부 작전참모([[강문봉]])가 "너희들이 주공으로서 국가를 살릴 수 있다."는 말과 문산호 뒤를 따르는 수백 척의 배를 보고 영웅 된 기분이라고 생각했지만 해가 지고 난 이후에 다시 보니 따라오던 배가 한 척도 없었다고 한다. * 3일간의 전투만 진행한다고 '''딱 3일간의 전투물자만 지급했다'''. 때문에 상륙 당시의 혼란 및 철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의 주력부대와 교전하는 막장사태가 벌어지자 식량과 탄약이 모자르게 된다. '''이 상황에서 무려 4일간이나 버틴 것이 기적'''이다. 다행히 상륙 후에나마 미 해군의 95.2기동전단이 발벗고 달려와 화력지원은 물론, 식량과 탄약도 일부 보급해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미 해군 순양함, 구축함의 지원이 없었으면 전투력이 빈약한 유격대대는 철수 준비가 완료되기 전에 북한군의 반격에 전멸했을 것이다. * 해당 작전이 끝나고 서울을 탈환한 후 북진작전이 시작된 시점인 1950년 10월 5일에서야 부대원들에게 입대명령과 036군번이 내려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그 때까지는 법적으로는 군번도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싸운 셈이다. 부대원들은 장사 상륙작전이 끝나고 부산항에 도착한 후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가 창설돼서 자신들이 거기 속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후 부대원들은 11월 말까지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서 적 패잔병 소탕 임무에 종사하다가 12월 19일 자로 서울에서 부대가 해체되고 일부 인원은 장교 지원, 대부분은 사병으로 2사단 32연대에 편입되었다. 당시 부상으로 입원해 있던 이명흠 부대장이 나중에 이를 알고 극력 항의했으나 조치는 되돌려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